기억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며 새로운 기억술을 개발할 가능성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단서가 기억의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술에 한계를 느낄 경우, 우리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기억의 한계를 알맞게 우리의 삶을 조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기억에 대한 요구를 줄이는 방향으로 습관을 들이는 것이 나의 제한된 정신능력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열쇠들을 언제나 똑같은 장소에 놓으며, 직장에 가져갈 물건들은 언제나 현관 옆에 놓는다. 우리의 맥락 기억이 지닌 여러 문제점들을 생각할 때 과연 이런 기억체계가 주는 이익이 예컨대 기억의 속도가 그것 때문에 드는 비용보다 더 큰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는 이익이 비용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비용 없이도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글(google)이 바로 그 증거다. 물론 그 밖에도 다른 많은 검색 엔진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검색 엔진들의 밑바닥에는 우편번호 기억의 기층(지도의 방식으로 잘 조직되어 접근이 용이한 정보)이 깔려 있으며 그 위에 맥락 기억이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기층의 우편번호 체계는 신뢰도를 보장하는 반면에, 위에 있는 맥락 체계는 어떤 순간에 가장 필요한 기억이 무엇 일지를 추론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우리의 진화가 위치에 따라 조직된 기억 체계에서 출발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런 형태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것의 이점은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인지적 산맥의 이 부분을 전혀 정복하지 못했다. 진화 과정이 맥락 기억과 일단 마주치자 또 다른 꼭대기를 찾아 헤매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에게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기억이 필요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마치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일뿐이다. 다시 말해 우편번호 기억과 비슷한 틀을 만들어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기층 위에 덧씌우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살펴볼 때 만약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스티븐 핑커가 언젠가 말했듯이 "상당한 정도로 우리의 기억은 우리 자신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기억은 인간 정신의 원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매우 많은 것이 기억에 의존하고 있지만 기억은 심할 정도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컴퓨터로써가 아니라, 말 그대로 행위자로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동하는 유기체, 세계를 지각하고 그것에 반응해 행동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런 사정 때문에 정확성보다는 속도를 중시하는 기억 체계가 발달하였다. 많은 상황에서 특히 신속한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최근도의 빈도와 맥락은 기억을 조정하기에 적합한 강력한 도구들이다. 우리 조상들은 거의 언제나 즉각적인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살았다. 그리고 인간 이외의 거의 모든 생물들은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나 자주 일어나는 사건처럼 상황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한 기억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먹이를 찾고 위험을 피하는 등의 여러 도전을 헤쳐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쥐 나 원숭이의 경우에도 관련된 일반 정보를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때가 많다. 법정 증언에서 관찰되는 동기 해석의 오류나 편향에 대한 관심 따위는 여기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법정에서, 직장에서 또는 그밖에 일상의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 이전의 우리 조상들이 거의 접하지 않았던 종류의 요구들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열쇠를 어디에 두는지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어디에 두었는지 특정 정보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누가 우리에게 무엇을 언제 말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의 기억 한계가 미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억 전문가인 헨리 뢰디거는 기억의 오류가 추론을 가능케하기 위해 필요한 대가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댄 샥터는 기억의 단편성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준비케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조각들을 이어 맞추는 식으로 작동하는 기억이 기록의 완벽한 저장소 같은 기억보다 미래의 일들을 가상적으로 상상해 보는 데 더 적합할지 모른다." 그 밖에도 사람들은 흔히 말하길, 어떤 일들은 차라리 잊는 편이 나으며, 불완전한 기억이 오히려 고통을 줄여준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들은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 이것들을 지지하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간 기억의 일상적인 오류가 특정 종류의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은 한 가지 요점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해서 곤란을 겪는 일들은 우리가 잊고 싶어 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속하지만 신뢰하기 어려운 맥락 기억을 토대로 우리의 추론 능력이 발달했다는 사실은 어떤 이상적인 타협의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역사적 사실일 뿐이다. 추론에 사용되는 두뇌 회로가 왜곡될 수 있는 기억을 가지고 작업하는 까닭은 그것이 진화를 통해 생겨난 유일한 토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려 깊은 추론에 적합하면서도 정말로 믿을 만한 기억을 갖추려면 진화의 과정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야만 할 것이다. 만약 그런 체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강력하고 세련된 것이겠지만, 또한 그것은 간단히 말해 진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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