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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경제학이야기

페이스북과 엔젤 투자가들 이야기

by 발칙한상상가 202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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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에 아마존의 베조스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미국 잡지 <타임>은 2006년 '당신(You)'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선정된 인물이 나오는 표지에는 컴퓨터가 등장하고 유튜브를 모방한 화면 부분에는 은박이 거울처럼 써져 있었다. 슬쩍 들여다보면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것처럼 보여 '여러분 이야말로 이 정보의 시대를 컨트롤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이제 정치도 경제도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라 블로그와 SNS로 대표되는 무수한 개인정보 발신자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혜성처럼 등장한 것은 야후도 구글도 알리바바도 아니고 2004년 창업한 지각 참여자이자 신출내기인 페이스북이었다. 하버드대학교에 다니던 마크 저커버그가 친구들과 함께 하버드대학교 학생 온라인 인명록으로 만든 것이 토대가 되었다. 출범자금은 대학 동기 왈도 세브린과 공동출자한 1,000달러가 전부였다. 이 서비스가 순식간에 인근 대학에까지 퍼지자 저커버그는 성공을 확신했다. 하지만 너무도 빠른 성장속도에 인력도 자금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저커버그는 냅스터의 공동창업자 숀 파커의 제의를 받아들여서 거점을 실리콘밸리로 옮기고 본격적인 확장에 나선다. 어쨌건 목적은 돈이었다. 파커의 소개로 페이팔 공동창업자인 피터 틸과 동료들에게 50만 달러의 투자를 받고 이사로서 후방 지원을 받았다. 틸은 페이팔을 이베이에 매각하면서 받은 5,500만 달러를 밑천으로 금융투자 활동을 시작했는데 페이스북과 같은 스타트업 회사에 투자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틸은 결국 이 투자로 1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페이스북도 수익을 내는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히트는 쳤지만 그걸로 어떻게 수익을 낼까에 대한 해답을 쉽게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하는 모바일화에도 뒤늦게 착수했다. 하지만 사용자의 모바일 전환이 페이스북을 살렸다. 외출하거나 이동 중에 시간을 때우기 위해 많은 사람이 페이스북에 시간을 쏟게 된 것이다. 실시간으로 사진과 댓글을 올렸다. 2013년 7 ~ 9월까지 월간 액티브유저는 12억 명이었고, 그중 컴퓨터와 모바일 단말기를 병행한 사용자가 9억 명 모바일 단말기 사용자가 2억 5,000만 명이었다. 모바일 대응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페이스북 수익의 80 ~ 90%는 광고이며 그 외의 수수료 수입은 아주 소액에 불과하다. 구글은 검색 키워드로 사용자의 현재 관심사를 알고 그와 관련된 광고를 화면에 등장시키며 거대하고 효율적인 광고 미디어가 되었다. 페이스북은 한없이 자세히 알 수 있는 사용자의 속성과 친구관계를 토대로 개인 맞춤형 광고를 내보내는 미디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 효과와 장래성은 미지수다. 미국에서는 이미 부모도 해서 싫다며 10대가 이탈하기 시작했다. 많은 선진국의 사용자들이 라인 등으로 옮기는 추세다. 중국에서는 텐센트가 7억 명이 사용하는 QQ공간(페이스북 타입)과 QQ(트위터 타입), 위쳇(Wechat)의 복합 서비스로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페이스북은 그 시스템상 원래 관계성이 강한 사이가 많아서 결국 친구끼리만 폐쇄적으로 의견과 정보를 서로 공유하는 우물 안 세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가 사회성의 붕괴라며 경종을 올려왔다. 2012년 초에 그런 불안에 대한 페이스북의 반론이 있었다. <정보확산에 따른 소셜네트워크의 역할>이라는 논문에서 페이스북의 학술연구팀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에서 소수의 끈끈하게 연결된 다수의 관계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특히 귀중한 정보는 대부분 그런 데에서 얻는다라고 결론 내렸다. 정보 확산의 대부분은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이 논문은 MIT의 학생시절부터 페이스북 연구원으로 활약한 이탄 박쉬가 작성한 것으로 페이스북 사용자 2억 5,000만 명이 주고받은 120억 건의 커뮤니케이션을 실험·분석한 결과다. 사상 최대 수준의 실제 데이터 분석이 인터넷의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의 힘을 보여주었다. 피터 틸을 페이스북에 소개한 이는 따로 있었다. 링크드인의 창업자 리드 호프먼이었다. 파커에게 페이스북 출자를 제안받은 호프먼이 내가 끼면 서로 이익이 줄어들 수 있으니 친구를 소개하겠다며 페이팔 시절의 친구 틸과 연결시켜준 것이다. 링크드인은 비즈니스 커리어에 특화된 SNS로 현재 세계 200개국의 2억 8,000만 명이 등록되어 있다. 특징은 비즈니스에 초점을 둔 친구, 지인끼리 친분 쌓기와 서로 간의 평가이며 이를 통해 개개인이 누구와 알고 있는가 어떤 스킬과 경험이 있는가 그것을 지인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링크드인은 그것을 돈으로 만들어냈다. 그것도 광고수입이 아닌 형태로 말이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2시간짜리 면접을 5번 보는 것보다 친구, 지인끼리의 평가, 특히 일반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부터의 평가가 훨씬 믿을 만한 것도 사실이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한 창업은 원래 벤처캐피털과 투자은행 혹은 극히 일부 호사가의 투자가 중심이었다. 아마존의 돈을 잡아먹는 원흉이었던 물류·IT 투자를 줄곧 지지해온 것은 1972년 창업한 벤처캐피털 클라이너 퍼킨스였다. 존 도어는 파트너 베조스를 신뢰하여 인터넷 거품 붕괴가 일어났을 때도 그를 버리지 않았다. 클라이너 퍼킨스와 세쿼이아 캐피털은 1999년 구글에도 투자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사업경험이 많은 사람을 CEO에 앉히라고 요구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베테랑 경영자 에릭 슈밋을 초빙했다. 슈밋은 그 후 10년간 구글의 성장을 든든히 받쳐주었고 두 벤처캐피털은 투자금의 1,000배가 되는 보상을 받았다. 과거 스타트업 기업이 벤처캐피털의 지원을 받는 것은 상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돌변한다. 투자를 받은 야후, 구글, 이베이, 애플 같은 IT계의 거인들이 벤처를 매수하는 입장이 되면서 그로 인해 많은 거금을 거머쥔 젊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기회에 자신의 자금을 대거나, 엔젤 투자가로서 스타트업 기업에 초기 투자를 하게 되었다. 세쿼이아 캐피털은 애플, 야후, 구글을 키운 명문 벤처캐피털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의 저커버그와 그의 동료들은 세쿼이아 캐피털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세쿼이아로부터 투자할 테니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오시오라고 연락을 받은 주커버그와 동료들은 약속시간보다 늦게 그것도 잠옷차림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투자 같은 거 하지 마라는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세쿼이아는 격노하여 투자계획을 철회했다. 페이스북에 투자한 파커를 옛날 냅스터에서 쫓아낸 것은 다름 아닌 세쿼이아였다. 이날의 에피소드는 어쩌면 그에 대한 앙갚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경영권을 유지하고 싶으면 초기 단계에서 벤처케피털에는 의지하지 마라가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상식이 되었다. 실리콘밸리에서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페이팔 마피아 같은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에 닿게 된다. 미국 전역에 23만 명이 있다고 추산되는 엔젤 투자가들에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사업계획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는 점점 조직이 아니라 개인이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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