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학/경제학이야기

닌텐도가 고안해낸 게임 플랫폼 모델 경제

by 발칙한상상가 2022. 12. 4.
반응형

닌텐도는 화투 제조판매 회사였다. 3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9년 할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자 스물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장에 오른다. 그가 맨 처음에 나선 일은 노동쟁의의 해결이었는데 이를 마무리를 짓는 데만 꼬박 6년이 걸렸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몸이 망가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회사에서 부업 삼아 만들던 도박장용 트럼프를 어린이용 완구 제품으로 탈바꿈하고 사업을 크게 도약시켰다. 트럼프 게임에 디즈니 캐릭터가 그려진 설명서를 첨부, 플라스틱제 트럼프를 만들기 위해 제조공장을 건설 이를 발판 삼아 닌텐도는 완구 제조업체로 변신을 시도한다. 야마우치는 장난감을 만들며 시간을 때우던 설비보수요원 요코이 군페이를 발탁하고 그의 아이디어로 울트라 핸드(집게손), 울트라 머신(야구배트 머신), 광선총 SP 등의 히트작을 연이어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사이 회사는 완구시장 외의 다각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전탁, 유모차, 호텔, 클레이 사격장 등 도전했지만 모조리 실패했고 1973년에는 도산 위기에 빠진다. 마침 그때 미국에서는 아타리가 업무용 전자게임인 퐁을 히트시키며 전자게임 시장에 많은 회사가 뛰어들었다. 아카리만을 위한 게임 전용 LSI(대규모 전자회로)를 개발하던 미쓰비시전기는 아타리가 망하면서 판매처를 잃자 닌텐도에 게임기를 상품화할 생각은 없냐라고 제안했다. 야마우치는 이를 받아들였다. 닌텐도 기술진은 1977년에 출시된 컬러텔레비전 게임 6 등을 개발하며 1980년에는 게임&워치, 1982년에는 통키 콩 등의 게임을 대히트시켰다. 닌텐도는 다각화 실패로 진 부채를 전부 갚고 도산 위기에서 빠져나왔다. 1976년에는 페어차일드가 직접 개발한 8비트 범용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한 가정용 게임기를 발매한다. 다양한 게임을 전용 롬(ROM) 카트리지로 공급하는 획기적 방식이지만 자사 개발품만으로는 게임 종류가 한정적이었다. 1977년 아타리가 VCS(아타리 2600)를 출시했다. 그와 동시에 서드파티가 제작한 게임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판매를 허용함으로써 1980년 무렵부터 폭발적인 판매 행진을 기록했다. 그중에는 업무용 게임에서 가정용 게임으로 넘어온 타이토의 스페이스 인베이더(1980년)와 남코의 팩맨(1981년)과 같은 게임 역사에 남을 소프트웨어도 있었다. VCS용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세계에서 100만 대, 팩맨은 700만 대가 팔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큰 인기는 품질이 낮은 소프트웨어의 남발로 이어지면서 1983년에 아타리 쇼크로 불리는 시장 붕괴가 일어났다. 같은 해 7월 닌텐도는 패밀리 컴퓨터(패미컴)를 출시한다. 부침이 심했던 업무용 게임산업에서 손을 떼고 게임&워치로 번 돈을 몽땅 투자하여 개발한 것이다. 야마우치가 아타리 쇼크로 배운 것은 재미없는 소프트웨어가 출시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게임기라는 하트웨어만이 아니라 게임 소프트웨어 자체의 품질을 높게 유지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생각했다. 게임기 자체는 보급을 위해 저렴하게 판매했다. VCS의 후속 기기는 2만 4,800엔이었으나 패미컴은 제조원가에 가까운 1만 4,800엔이었다. 새로운 게임기를 보급할 때까지 자사가 개발한 재미있는 소프트웨어로 고객을 끌어오기 위해 업무용으로 인기가 있던 동키콩, 마리오브라더스 등을 투입했다. 게임 소프트웨어의 정가를 5,800엔으로 높게 책정하고 제작업체로부터 로열티 등을 받아 수입을 올렸다. 서드파티 소프트웨어에 라이선스를 도입하고, 초기에는 허드슨, 남코, 잘레코, 캡콤, 타이토 등 규모가 큰 회사만을 대상으로 게임을 받았다. 소프트웨어를 집어넣는 롬 카트리지는 닌텐도가 생산하기로 정하고 한 대당 2,000엔의 선불을 받았다. 또 최저 발주 수를 1만대로 정함으로써 과잉생산을 견제했다. 패미컴은 발매한 지 반년 후부터 급격하게 매출이 올라서 1년 반 만에 200만 대 이상을 팔아치우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1985년에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드래곤퀘스트 등이 연이어 히트하며 1989년에 닌텐도의 매출액은 2,900억 엔을 기록했다. 시장 진출 5년 만에 매출도 이익도 4배가 된 것이다. 1985년에는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라는 이름으로 북미시장에 진출하여 침체되었던 가정용 게임 시장을 부활시켰다. 1996년에 아타리가 시장에서 철수하고 2001년 엑스박스가 등장할 때까지 북미지역은 일본 게임기가 시장을 지배했다. 패미컴은 결국 세계에서 6,300만 대가 판매되는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차세대 16 비트 기인 슈퍼패미컴에 그 바통을 넘겨주었다. 닌텐도는 패미컴을 통해 2가지 면에서 획기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탄생시켰다. 먼저 수익구조 면에서 보면 일단 본체를 저렴한 가격에 보급한 후 소프트웨어로 수익을 내는 갈아 끼우는 날 모델이었다. 하지만 질레트처럼 갈아 끼우는 날 부분을 지적재산으로 보호하고 1개 사가 이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서드파티를 폭넓게 활용하는 개방형 갈아 끼우는 날 모델을 채용했다. 단 라이선스와 게임 내용의 사전 심사를 통해 서드파티를 엄격하게 컨트롤했으므로 반밀폐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 능력 면에서 보면 자사 내에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개발력도 보유함으로써 하드웨어를 시장에 투입할 때 자사 소프트웨어로 고객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러한 능력이 없었던 아타리의 VCS는 유력한 게임 소프트웨어 회사를 불러들일 수 없었다. 보급이 안 될지도 모르는 하드웨어용 전용 소프트웨어를 무턱대고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또 하드웨어는 핵심 부분을 단독으로 개발하거나 자유경쟁을 통해 조달 대신 도요타와 같은 공동 개발체제를 택하여 리코와 손을 잡고 커스탐칩을 개발했다. 이는 100만 대 이상 팔지 못하면 비용이 커지는 등 위험부담이 컸으나 그 대신 타사에서 모방하기 어렵고 하드웨어의 고성능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표준이 되는 규격만 만들고 자사는 수익을 내지 못하 IBM PC와는 달리 닌텐도는 자사와 협력사가 안심하고 투자하여 이익을 올리는 공생 시스템으로서의 플랫폼을 만들어냈다. 그 우위성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 1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경쟁사를 물리치고 게임분야에서 아성을 지켰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