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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경제학이야기

대공황의 구원투수 존 메이너드 케인스

by 발칙한상상가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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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의 사상을 말하는 것일 테다. 케인스주의는 지금도 자본주의 경제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학문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고 선언한 인물이 공화당 출신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라면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부자 감세를 추진했고 시장의 자율을 절대로 훼손하지 않는 자유주의의 전통을 지닌 정당이다. 그런데 그 공화당의 수장이 케인스주의자를 자처했다. 케인스의 위력이 복지주의의 위용이 당시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소득주도 성장론의 원조쯤 되는 케인스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역사를 뒤바꾼 인물이었다. 물론 그는 자본주의 타도를 기치로 내걸었던 마르크스와는 완벽하게 다른 길을 걸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될 것이라고 내다봤지만 케인스는 자본주의를 얼마든지 고쳐 쓸 수 있는 제도라고 확신했다. "만약 극한적인 계급투쟁이 발생한다면 나는 자본가 편에 서겠지만, 가능하면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가난한 계급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케인스의 말은 그의 사상적 위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정부의 시장 개입을 촉구한 케인스는 학계로부터 "사회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1930년 대공황의 위기에서 자본주의를 구했다. 자칫했으면 온 세계가 사회주의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었던 상황을 케인스의 기지로 역전시킨 것이다. 공화당 대통령 닉슨이 케인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며 케인스주의자를 자처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적으로 모든 경제 위기와 공황은 공급과잉이라는 현상에서 비롯됐다. 기업이 생산하는 물건은 산더미처럼 쌓여 가는데, 그 물건이 팔리지 않을 때 경제는 뿌리부터 흔들린다.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경제 위기는 1930년 벌어졌던 대공황이었다. 이 대공황의 원인도 공급과잉이었다. 1910년대 포드 자동차가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포드 시스템'을 도입했다. 혁신적인 기술의 발전으로 기업의 생산성은 다섯 배 이상 높아졌다. 압도적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신흥 경제대국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세계에서 유통되던 금의 60%를 싹쓸이할 정도로 풍요로웠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시한폭탄을 창조한다.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의 위력을 확인한 자본가들은 쓸모가 없어진 노동자들을 사정없이 해고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대공황 이전까지 세상을 지배했던 경제학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던 이른바 세이의 법칙(Say's law)이었다. 세이에 따르면 기업이 물건을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공급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므로 공급과잉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이의 법칙을 신봉한 수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민들의 소득에는 신경을 끄고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대공황은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는 거대한 재앙이었다. 공급이 과잉 상태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물건의 가격이 떨어져 수요가 증대할 것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기초 논리가 박살이 났다. 상점에는 안 팔리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상품 가격은 매일 하락했는데 물건은 여전히 팔리지 않았다. "가격이 떨어지면 수요가 늘어난다."는 이론은 소비자들의 호주머니에 다만 얼마라도 돈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대량 실업사태로 거덜이 난 미국 민중들의 호주머니에는 상품의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그것을 살 돈이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1832년 미국 노동자의 임금은 대공황 이전에 비해 3분의 1로 주저앉았다. 실업자는 5,000만 명을 넘어섰다. 국민 소득의 70%가 사라졌고, 공산품 생산도 전반으로 줄어들었다. 이 시기 전 세계 무역 거래량은 대공황 직전에 비해 30% 수준으로 감소했다. 물건이 안 팔리니 공장이 망하고, 공장이 망하니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더 빨리 사라졌다. 이 여파로 국민들이 가난해지니 물건이 더 안 팔렸고, 공장도 더 빨리 망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대공황은 인류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처참했던 시기였다. 

대공황이라는 처참한 사태를 지켜본 케인스는 기존의 경제학을 사정없이 비웃었다. 그는 경기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간단한 해법을 제시했다. 

"정부가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냥 빈 병에다 돈을 잔뜩 넣어서 그걸 탄광에 묻어버리세요 그리고 그 위에 쓰레기를 쌓아두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부르세요 저 안에 돈이 묻혀 있으니 파서 쓰라고 말이죠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땅을 파는 일을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빈 병에 들어있는 돈을 갖게 되겠죠, 사람들에게 소득이 생길 겁니다. 돈이 생긴 사람들은 물건을 살 것이고, 그러면 공장도 제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정부가 진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면 그냥 이런 짓이라도 하세요, 그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요,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짓보다는 정부가 도로나 주택을 짓는 게 더 좋긴 하겠죠."

케인스는 공급, 즉 기업을 중심으로 운영됐던 경제학의 틀을 완전히 바꿨다. 그는 기업이 아니라 소비자를 공급이 아니라 수요자를 중심으로 경제의 틀을 재편할 것을 권했다. 하다못해 "빈 병에 돈을 넣어서 탄광에 묻은 뒤 나눠주라"는 그의 주장은 경제의 핵심이 생산이 아니라 분배에 있다는 장엄한 선언이었다. 이런 케인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지도자가 등장했다.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32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루스벨트는 케인스의 말대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을 극대화시켰다. 유명한 '뉴딜(New Deal) 정책'이 자본주의의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루스벨트는 댐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는 등의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최저임금제를 도입했고 사회복지 정책도 강화했다. 이런 정책들은 단순히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인도적 차원에서 벌인 일이 아니었다. 정부가 국민들의 호주머니에 돈을 채워줘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케인스의 철학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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