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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경제학이야기

대공황(Great Depression) 이야기

by 발칙한상상가 2022.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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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아침,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가 개장했다. 모든 것이 어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장이 마감할 때는 끔찍한 목요일(Black Thursday)이 되었다. 오전에 주식 가격이 일제히 내렸지만 한 달 전부터 비슷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던 터라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은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거의 모든 종목의 주식 가격이 떨어졌고 하락 폭은 갈수록 커졌갔다. 월스트리트의 고층 빌딩 옥상에 어떤 남자가 나타나자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였다. 남자는 죽으려고 올라간 게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곧 뛰어내리리라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오해는 아니었다. 파산한 투자자의 자살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막판에 은행과 투자회사들이 자금을 총동원해 폭락세를 가라앉혔지만 어제까지의 열광적이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닷새 뒤 화요일에는 더 강력한 폭락의 파도가 몰아쳐 주가지수를 반토막 냈다. 1929년 10월 24일 이후 열 달 동안 뉴욕의 주가는 폭락을 거듭하면서 8/1 수준까지 내려갔다. 주가 폭락의 파도는 대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런던·파리·베를린·도쿄의 증권거래소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세계 모든 도시와 산업이 곤두박질쳤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체제는 19세기부터 여러 차례 심각한 불황을 겼었지만 그토록 길고 파멸적이고 세계적인 불황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고 한다. 단 한 번 있었던 일이어서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산업시설이 잿더미가 되고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까지 짊어진 독일이 최악의 경제난에 허덕이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종속국 민중은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미국과 유럽 선진국의 경제는 호황이었다. 강대국들이 군비확장 경쟁을 벌이기는 했어도 당장 전쟁이 날 낌새는 없었다.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거머쥔 미국의 기업들은 유럽의 전후 복구 사업에 투자해 큰 수익을 얻었다. 미국 사회 내 반공 캠페인, 인종주의 테러, 마피아 갱단 이권 다툼 있었지만 미국 사회는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신문과 잡지 산업이 번창했고 라디오가 새로운 미디어로 등장했다. 자동차가 중산층 가정의 필수품이 됐고 대도시 중심에 고층 빌딩 숲이 생겼으며 플로리다를 비롯한 시골 지역에 전원주택 건설 붐이 일었다. 대중은 각종 프로 스포츠와 미인대회에 열광했던 시절이다. 대공황은 미국의 그 모든 번영이 이뤄지고 상징적인 도시 뉴욕 증권거래소를 가정 먼저 발생했다. 경제위기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는 사실을 지금은 누구나 알지만 그때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학자도 예측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러듯 경제도 움직인다. 좋은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듯이 말이다. 좋은 때는 간단하게 호황이라 하지만 나쁜 때를 가리키는 말은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침체는 가볍고 불황은 심각하다. 불황이 갑자기 찾아와 모든 경제주체가 공포에 빠지면 공황(panic)이고, 그런 상태가 오래 이어지면 위기(crisis)라고 한다. 대공황은 이례적으로 깊고 길게 이어진 불황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몇백 년 동안 호황과 불황을 되풀이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경기변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합의하지 못했다. 서로 다른 진단과 처방을 내놓고 저마다 자기 의견만 주장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합의하지 못할 것처럼 말이다. 불경기 또는 공황이 닥칠 것이라고 예측한 이는 있었다. 하지만 1929년 10월 24일에 시작된다거나 그토록 심각하고 오래 이어지리라고 내다본 사람은 없었다. 대공황이 끝난 뒤에도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지는 못했다. 미국 정부의 금융 정책 실패 여러 우발적 사건의 중첩, 시장경제의 구조 결합 등 다양한 분석과 논문이 나왔지만 대공황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완전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경제는 짧은 호황을 누렸다. 1925년 4월 영국 정부는 파운드화와 금의  교환비율을 고정한 금본위제 복귀를 결정했고 미국과 프랑스 등 주요국의 참가해 국제금융 체제를 안정시켰다. 미국 금융회사들은 1920년대 중반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 해마다 10억 달러 넘는 돈을 빌려줬다. 영국은 제조업 불황과 대규모 파업 등 장기 침체를 겪었고 일본은 1923년 간토 대지진의 충격으로 내홍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호황을 누렸고, 식민지와 종속국의 농산물과 원료 생산도 크게 늘었다. 1925년부터 밀, 사탕수수, 면화, 고무를 비롯한 농산물 가격이 하락했다. 세계적인 농업 불황은 대공황 직전까지 이어졌으며 국제 농산물 가격 지수는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농산물과 원료 가격이 떨어져 생산비를 절감할 수 있게 되자 기업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소비자인 농민의 소득이 감소하는 것이 기업에 꼭 좋은 것만 아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국내총생산의 25%를 농업이 담당했다. 1920년 후반에는 건축 경기가 하향세를 보였고 1929년 들어서는 공업생산량 증가세가 멈췄다. 실물경제가 침체 조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뉴욕 증권거래소의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모든 사업분야, 모든 기업의 주식 가격이 오르기만 했다. 처음에는 의사와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이 주식을 샀고 상인과 사무직 노동자들이 뒤를 따랐다. 주식으로 벼락부자가 된 점원과 간호사 이야기가 미디어에 나돌자 트럭 운전사. 공장 노동자, 가정주부가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대공황이 터진 시점에서 주식에 투자한 미국 시민은 100만 명이 넘었다. 자기 돈만 투자한 게 아니었다. 땅과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한 돈으로 투자했고,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더 많은 주식을 샀다. 호경기가 언젠가 끝나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았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1929년 10월 24일이 바로 그때였다. 그날 오전 호황이 끝나는 시점이 임박했음을 예감한 투자자들은 남보다 한발 먼저 주식을 팔아 이익을 실현하거나 손실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자 예측은 곧바로 현실이 됐다. 자산 가치가 비누거품처럼 꺼지자 주식을 담보로 은행 돈을 빌린 사람들이 먼저 파산했고 부동산 담보 대출을 받은 사람들은 땅과 집을 압수당했다.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이 쓰러지자 기업과 개인의 예금통장이 휴지조각으로 변했고 시민들은 그런 사태를 피하려고 예금을 인출해 개인금고에 넣었다. 멀쩡한 은행들이 일시에 몰련든 예금 인출 요구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담았다. 그때는 주식시장의 거래 제한 규정이나 예금 보호 제도가 없었다. 연방준비은형(FEB)이 1913년에 출범했지만 은행의 연쇄 파산을 막을 만한 권한이 없었다.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자 기업 도산 마구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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